비잔틴-페체네그 전쟁; Total War (3)

  지난했던 1050년은 지나가고 1051년이 다가왔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동방군 사령관들에게 언질을 넣어 유럽으로 군대를 이송시킬 것을 지시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체네그 인들이 다시 남하해서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약탈하자 제국 정부는 그동안 모은 군대를 규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군대는 용병으로 고용된 프랑크 및 바랑기안 동맹군(포에데라티)에 황제가 검은 산과 카르카로스 등의 텔루크 테마에서 동원한 2만여 명의 궁기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군대의 총지휘관으로 용병지휘관(Ethnarches)’에 제수한 브린니오스가 임명되었습니다. 이 군대는 페체네그를 상대로 파견되었으며 이미 전선에 뛰어들었던 바랑기안 지휘관’(Akolouthos)인 미하일의 군대와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미하일은 브린니오스보다 일찍 파견되었으며 페체네그 군과 전면전을 피하고 적의 진공을 방해하라는 명령을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소규모 접전이 계속 이어져서 미하일의 군대는 골로이(Goloe)에서 마주친 페체네그 군을 전멸시켰고 토플리초스에서 마주친 페체네그 군 파견대를 패배시켰으며 이후 브린니오스의 군과 합류했습니다.

페체네그 군의 남하와 미하일의 활약상


  전선이 다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 제국 정부는 분열책을 시도했습니다. 황제는 감옥에 갇혔던 케겐을 석방해 페체네그 군에 화의를 청하면서 분열시킨 후 일부를 제국측으로 끌어들일 계책을 마련했습니다. 케겐이 페체네그 족 가운데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케겐은 페체네그 인들로부터 안전을 보장하는 맹세를 받고 제국의 대사로 파견되었습니다만 도착하자마자 살해되고 그 시신은 토막나버렸습니다. 페체네그 인들도 케겐이 오면 어떠한 일이 생길지 대략 예상할 수 있었기에 제국 대사이자 로마의 귀족이며 동시에 페체네그 족의 신망을 얻은 사령관으로서의 케겐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고 결국 그 종결은 파국으로 끝났습니다.

  한편 페체네그의 파견대가 콘스탄디누폴리 근교의 카타시르타이란 마을까지 진격해 들어오자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고인이 된 조이 황후의 침실 관리인이었던 환관이며 현자로 불리는 요안니스에게 일군을 맡겼습니다. 요안니스는 페체네그 인들이 대량으로 음주한 뒤 술에 곯아떨어진 틈을 타서 야간 기습을 감행해 그들을 학살하고 그 수급을 수레에 실어 황제에게 헌상했습니다.

  소소한 전투에서의 작은 승리 얼마 후, 마침내 오랫동안 제국 정부와 황제가 고대해왔던 대승의 소식이 전해져왔습니다. 브린니오스와 미하일의 연합군은 자신들의 군대가 두려워 트라키아에서 마케도니아로 주둔지를 옮긴 페체네그 군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미하일과 브린니오스는 밤중에 몰래 아드리아누폴리를 출발하여 군대와 함께 카리우폴리에 도착했으며 주력군을 피하라는 황제의 명과 달리 회전을 통해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곧 연합군은 페체네그 군이 행군하고 있을 때 돌격해 들어갔으며 렌타키온 산까지 이들을 추격하며 무거운 손실을 입혔습니다. 전면전에서 이 정도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전쟁 발발 후 처음이었습니다. 당연히 전황은 순식간에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미하일은 하이모스 산맥 이남의 시데라 지역에서 페체네그 군을 몇 차례 더 격파했으며 페체네그 인들이 카리우폴리 회전 이후 그 예봉이 확실히 무뎌짐에 따라 마침내 하이모스 산맥 이남의 지역은 페체네그 군의 약탈이 근절되었습니다. 이 승리가 얼마나 의미가 큰 것이었는지는 이후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카리우폴리 회전 이후 2년간(1051-1052) 페체네그와 관련된 어떠한 기록도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리고 1053년에 다시 나타난 페체네그 관련 기사는 시데라 이북의 페체네그를 정복하라는 황제의 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국의 역습(?)

  2년이 지난 1053,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이제 마지막 한 번 더 페체네그 군과 싸워 전쟁을 종식하기를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다시금 동방과 서방의 모든 지역에서 군대를 동원했고 이 군대를 카리우폴리의 영웅, 미하일에게 맡겼습니다. 또한 불가리아의 행정관인 바실리오스도 불가리아 군을 동원해 페체네그 원정에 참전했습니다. 하이모스 산맥을 건넌 제국군은 대 프리슬라프 근교에서 숙영했으며 이후의 작전에 대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어쩐 일인지 일제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보급품이 그만 다 떨어지도록 공격이 연기되자 군대는 순식간에 흔들렸고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조장한 것은 이 원정에 참전한 불가리아 행정관 바실리오스였습니다. 그는 안 그래도 바실리오스는 비밀리에 미하일을 꼴보기도 싫다고 말한 바 있었습니다.(...) 거기다 황제의 사람인 미하일이 원정을 성공으로 이끌면 전쟁의 승리를 직접 일군 셈이 되고 큰 영광을 얻을 것이기에 이에 질투를 멈추지 않아 끊임없이 전투를 거부했으며 페체네그를 공격하지 말라는 황제의 명을 이유로 대며 자신의 작전이야말로 공공선에 입각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시에 나중에 군대에 혼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계속해서 후퇴하자고 졸라댑니다.(...)

  지휘부가 혼선을 빚으면서 원정군 전체가 흔들리자 페체네그 군 총지휘관인 티라크 왕은 로마군이 대 프리슬라프의 포위를 풀고 후퇴할 것임을 예측해냈으며 군대를 파견해 로마군의 퇴로를 미리 장악하고 매복하게 했습니다. 결국 상당수 내지 대다수의 로마군이 궤멸당했으며 원정에서 최고의 X맨으로 자리매김했던 바실리오스도 퇴각이 확정되자마자 자신의 명마에 올라타 잽싸게 도주하다가 도랑에서 낙마한 후 몇 명의 페체네그 군에 둘러싸여 살해당하면서 데뷔전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한편 미하일은 많은 군사들이 사로잡히거나 학살당하는 와중에서도 패잔병들을 통솔하며 아드리아누폴리로 귀환하였습니다.

천려일실이라더니(...)


이러한 비참한 말로의 와중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장군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25년 뒤에 제위를 찬탈하게 되는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였습니다. 역사가 아틸리아티스가 니키포로스 3세에게 헌정한 칭송문에 의하면 당시 니키포로스 장군은 전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지휘부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군대를 질서정연하게 후퇴시켰습니다. 장군은 강을 따라 행군하면서 끊임없이 정찰대를 파견하며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사령관의 말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장군은 자신의 검과 방패를 들고 도보로 걸었습니다. 나중에 세 마리의 말을 발견했을 때도 니키포로스는 자기만 탈출하는 것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군대와 함께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점까지 계속 싸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군대는 11일간 영웅적으로 항전하며 남하했고 마침내 아드리아누폴리에 도착했습니다. 니키포로스가 보여준 인내와 용맹에 페체네그 인들조차도 존경심을 보였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회심의 원정이 또다시 어설프게 마무리되니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다시 실의에 빠졌습니다. 이제 황제는 재차 새로이 국민군과 용병을 모아 페체네그 인종을 모조리 쓸어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첩자를 통해서 티라크 왕과 그 지휘부로 전해졌으며 그렇지 않아도 보타니아티스가 후퇴 과정에서 보여준 광경에 깊은 인상을 받은 페체네그 지휘부는 그만 물러날 것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콘스탄디누폴리로 파견된 페체네그 대사가 평화를 구함으로써 양국은 30년간의 평화에 합의하였습니다. 역사가 아틸리아티스는 황제가 더 이상 군대를 파견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많은 재화와 명예를 페체네그 지휘부에 선사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고 서술했으나 페체네그 대사의 발언을 직접 기록한 스킬리치스, 그리고 새로운 군대를 모았다는 스킬리치스, 글리카스의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습니다. 한편 구체적인 평화조약의 안은 확인할 수 없으나 일단 양쪽간의 포로 송환과 페체네그 족의 도나우 강 이북으로의 후퇴 정도는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렇게 제 1차 페체네그 전쟁은 간헐적으로 계속되면서 약 7년 만에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 종결되었습니다. 이 전쟁을 거치면서 국가의 많은 재부가 끊임없이 소모되었습니다. 그 직접적인 증거로 황제 즉위 무렵과 초기 무렵에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의 순도를 유지하던 기준 금화가 전쟁 기간 동안 계속해서 순도가 낮아졌으며 1054년의 마지막 순도 저하가 일어난 후 약 70%대 초, 중반선에 고정되었습니다. 재정적으로나 국가 전체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나 점차 위기가 도래하고 있었고 이를 넘기기 위해서는 지출을 줄이면서 재정을 개혁하는 방법을 통해 경제 회복을 추구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디노스 9세 황제는 10551월에 사망하면서 그 과제는 후대의 황제들에게 인계되었고 콘스탄디노스 10, 이사키오스 1, 미하일 7세 등이 여러 방법을 통해 경제 회복을 시도했으나 불안정한 국방 정책, 국제 정세의 급변과 내부 군벌의 준동 등에 의해 파행을 지속하였고 마침내 기존 체제는 1070년대와 1080년대에 완전히 붕괴되었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대략적으로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면 제 1차 페체네그 전쟁의 의의는 이러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체네그 족과의 혈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장 1059년에 헝가리-페체네그가 연합해 제국을 침공하자 이사키오스 1세가 이들을 물리치고 도나우 강을 넘어 페체네그를 원정하게 되고 108612월에는 페체네그가 다시 도나우 강을 넘어 쳐들어오면서 6년에 걸친 제 3차 페체네그 전쟁이 발생했고, 1121년에 마지막 4차 페체네그 전쟁이 비잔틴 제국의 승리로 종결됨에 따라 70년에 걸친 비잔틴-페체네그 전쟁은 마침내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즉 이 글이 끝나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죠.(...)


p.s. 끙.... 아래아 한글->네이버->이글루스 순으로 붙여넣기 하니 영 구조가 이상해지는데 손도 댈 수 없군요;; 양해 바랍니다.


비잔틴-페체네그 전쟁; Total War (2)

  아드리아누폴리 시의 공작인 아리아니티스가 로비초에서 페체네그 군의 장군 중 한 명인 셀티의 진영을 급습해 페체네그 군은 도주하였으나 페체네그 군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페체네그 인들은 불가리아 동북부에 위치한 Hekaton Bounoi(백개의 봉우리들지역으로 옮겨 정착했으며 다시금 주변 지역에 대한 약탈을 시작했습니다.


로비초 습격과 케겐이 이끌던 부족의 탈주추격전 묘사

* 참고 : 이 지도의 Boukaton Henoi란 표현은 Hekaton Bounoi의 오기임을 알려드립니다.

 

 페체네그 군이 다시 통제에서 벗어나 하이모스 산을 넘어 제멋대로 정착한 후 폭주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다시 진압을 시작해야 했습니다따라서 콘스탄디노스는 파트리키우스 케겐을 소환해 이를 논의하고자 했습니다케겐은 휘하의 군을 규합해서 수도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마이타스 평원(오늘날의 트라키아 평원)에 군대가 머무르고 있을 때 세 명의 페체네그 인이 밤중의 틈을 타 케겐을 암살하려 했습니다그러나 케겐이 습격당하기 직전 그의 아들인 발차르가 소리를 쳐서 도움을 구한 덕분에 케겐은 큰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다음날 아침 발차르는 죄인들을 묶어 수레 뒤에 묶고 케겐을 보호하며 다시 수도로 향했습니다이들 죄수들은 그 죄질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죽일 수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로마 황제의 이름에 호소했기 때문이었습니다즉 이 상황에서 판결은 황제에게 전적으로 속한 것이었습니다발차르와 그 동생 굴리노스는 전 기병대에게 사륜 마차의 뒤를 따르게 하고 자신들은 도보로 국문이 이루어질 히포드롬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였습니다.


 곧이어 케겐을 암살하려 했던 음모자 세 명은 황제의 앞에 대령하였습니다황제가 이들에게 물어보았고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습니다.


K : 너희들은 왜 파트리키우스 케겐을 공격했는가?

P*3 : 케겐은 새벽에 수도로 입성해 학살과 약탈을 벌이고 그 다음에 페체네그 인들에게 돌아갈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제 국문의 대상이 바뀌었습니다황제는 사면을 원하는 그 세 명을 풀어주었으며 이번에는 케겐의 아들이자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발차르에게 물어보았습니다그러자 발차르는 항변했습니다.


K : 그대는 왜 음모자들을 잡자마자 처벌하지 않았는가?

B : 그들이 황제의 이름을 연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황도에 대한 음모라는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은 황제는 음모자들의 주장을 정확히 조사할 생각도 가지지 못하였으며 케겐을 황궁으로 옮겨 치료하게 해주었으나 곧 엘레판틴 감옥에 가두었고 그 아들들인 발차르와 굴리노스도 서로 다른 장소에 추방시켰습니다곧이어 황제는 케겐이 거느렸던 페체네그 군에 많은 선물을 제공함과 동시에 위험요소 제거를 위해 그들의 마차와 말을 압수했습니다.하지만 페체네그 인들은 많은 선물에 기뻐하며 황제를 환호했습니다.


 이렇듯 긴급조치로 케겐의 군대가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는 면하였으나 케겐이 이끌던 두 부족의 백성들까지 다잡지는 못했습니다지도자가 투옥되자 크게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이들은 재빨리 도주해서 나머지 페체네그 족에 합류했습니다이미 로비초에서 페체네그 군을 분쇄하며 활발히 전선 활동을 벌이고 있던 아리아니티스는 케겐의 백성들이 하이모스 산을 넘어 Aule에 진을 친 채 약탈을 벌인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이에 바로 출격해 그들을 격퇴하려 했으나 다마폴리에서 패배(상기 지도 참조)하였으며 폴리스라는 장군과 토르니코스 원정(2년 전인 1047년에 일어났던 대규모 반란 진압 작전)에서 활약한 쎄오도로스 스트라보미티스 장군이 전사했습니다황제는 다시 한 번 사태를 평화적으로 끝내기 위해 티라크 왕과 개종한 페체네그 귀족들에게 선물을 제공하였습니다그러나 이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맹세나 귀족 칭호개종과 같은 정주 사회의 이념에 얽매이기를 거부했으며 새롭게 얻은 재화를 이용해 세력을 오히려 강화했습니다.


 결국 대 페체네그 정책은 다시 강경책으로 전환되었습니다제국 정부가 처음으로 발진시킨 군대가 페체네그의 군대와 서전을 치루었습니다만 양측이 서로 팽팽하게 대치하였기 때문에 결정적인 결과를 낼 수 없었습니다대규모 전쟁만이 이제 해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황제는 Raiktor의 작위를 가진 니키포로스가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오자 동부 중앙군의 최고 사령관을 제수하고 백전노장인Stratelates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 및 용병 장교 헤르베 프랑고풀로스와 함께 동부 중앙군을 통솔해 페체네그 군을 상대로 파견되었습니다그러나 이 인사는 그다지 원만치 못한 것으로 지휘 경험이 별로 없는 니키포로스가 2급 지휘관으로 파견된 고참 카타칼론의 조언을 얼마나 듣느냐에 군사적 성패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이모스 산맥을 통과하는 시데라 길을 경유해 디아키니에 도착해 진을 쳤으며 총사령관 니키포로스는 적을 우습게 여긴 나머지 쉽게 이기리라 생각하고 여기에 보급품을 남겨두고 가볍게 페체네그를 치려 했습니다카타칼론 장군은 아직 적이 분산되어 있을 때 치자고 강하게 주장했으나 로마군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니키포로스는 카타칼론을 조롱하면서


적들은 덤불로 도주할 것이므로 사로잡기도 어려울 것이오. 

라고 말하였으며 자신의 지시에 간섭하지 말라고 덧붙였습니다.


 니키포로스가 군을 거느린 채 페체네그 군대와 맞닥뜨렸을 때는 이미 페체네그 전군이 규합한 상태였습니다전투가 즉시 시작되었습니다좌익은 헤르베 프랑고풀로스우익은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중앙은 니키포로스 자신이 통솔했습니다그러나 페체네그의 군대는 막강했습니다중앙과 좌익은 금세 밀리기 시작했으며 헤르베와 니키포로스는 퇴각해버렸습니다아이러니하게도 이 작전에 가장 반대했던 케카우메노스가 마지막까지 우익을 지휘하며 버텨보았으나 역부족으로 붕괴되었으며 케카우메노스 자신도 난전 중에 치명상을 입고 말았습니다완전한 패배였습니다케카우메노스는 이 전투에서 투구가 망가지면서 정수리에서 눈썹까지 큰 상처를 입었고 목 부분에도 입술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입었습니다출혈도 매우 심했는데 다행히 케카우메노스가 도나우 강 연안의 요새를 다스렸을 때부터 알아왔던 케겐의 아들 굴리노스가 장군을 구출해 간호하여 기사회생시켰습니다.

강력한 로마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자 페체네그 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불패한다는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반대로 예상과는 달리 연패를 면치 못하자 로마 정부는 바짝 긴장하였습니다이제 전쟁의 흐름은 페체네그 인들에게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콘스탄디노스 황제는 로마군의 궤멸 소식에 크게 실의하였으며 다시 군대를 모아 해를 넘긴 후 1050년에 다시 전술전략에 수정을 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디아키니 전투(1049)와 바실리키-리바스 전투(1050)


 한편 페체네그 군은 트라키아의 중심 도시이자 마케도니아 군관구의 주도인 아드리아누폴리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황제는 용병대장 헤타이리아르키스인 콘스탄디노스에게 최고 지휘관(스트라티고스 아우토크라토르)의 직함을 주고 군을 주어 맞대응 시켰습니다콘스탄디노스는 최근에 동방에서 옮겨온 부대와 서방 지역에서 겨울을 보낸 부대를 집결시켜 원정을 계획하기 위해 아드리아누폴리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척후대를 통해 페체네그 인의 긴급한 행군의 소식을 접한 총사령관은 휘하 장군들을 자신의 천막으로 불러 응전할 것인지를 논의했습니다하지만 지휘관 회의가 강경론자인 사무일 부르치스란 장군의 독단적으로 페체네그를 공격하더니 곧 어려움에 봉착해 구원을 요청하는 바람에 논의는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부르치스의 군대가 괴멸되어가자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제국군도 아드리아누폴리를 나와 근교의 바실리키-리바스란 장소에서 페체네그와 일전을 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르치스의 군은 거의 붕괴되었고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투에 휩쓸린 나머지 군도 결국 아드리아누폴리의 진영에 고립된 채 포위를 버텨야 했습니다제국군은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진영이 거의 붕괴되기 직전까지 밀리는 등 최악의 위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로마군을 구원한 것은 기계 무기였습니다캐터펄트 부대가 쇠뇌를 쏘아대자 기세등등하던 페체네그 군도 피해가 급격히 커지면서 추가적인 공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 전투는 작년의 전투보다는 확실히 양측이 팽팽하게 맞선 전투였습니다양쪽에서 아주 적지도 않지만 딱히 많다고 할 수는 없는 사상자가 났는데 장교진의 사상자가 더러 있었습니다로마군에서는 콘스탄디노스 아리아니티스 장군이 폐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3일 후에 사망했으며 미하일 도키아노스 장군은 페체네그 군에 사로잡혀 페체네그 군 지휘관 앞에 끌려갔을 때 치명상을 입히고 그 보복으로 토막으로 잘리며 비참하지만 영웅적인 죽음을 맞았습니다페체네그 쪽에서는 술초스라는 지휘관이 캐터펄트의 대규모 쇠뇌 발사 때에 타고 있던 말과 함께 즉사하는 피해가 있었습니다그 다음날 근처에 있었던 로마군과 미리 배정되었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로마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강화하였으며 그 다음날 소규모 페체네그 군이 다시 진격해왔을 때 이를 물리쳤습니다결국 더 이상 오래 주둔할수록 불리할 것임을 파악한 페체네그의 사령관은 전군을 거느리고 퇴각해야 했습니다.


고대 로마 시절의 발리스타

 

 디아키니 전투와 바실리키-리바스 전투를 통해서 제국 정부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페체네그의 군대를 효과적으로더 쉽게 상대하기 위해서는 전면전으로 적의 대규모 군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적들이 분산되어 약탈하고 있을 때 이를 미리 저지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그리하여 전쟁 2년차가 마무리되어가던 무렵(아직 1050)에 새로운 전략이 입안되었습니다라틴인 사령관의 지휘에 곳곳에 산재한 방어군을 두고 약탈자에 공동으로 대응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마침내 1051황제는 다시금 동방군 사령관들에게 서신을 보내 페체네그에 맞설 군대를 유럽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이제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는 1051년이 밝아왔습니다!


비잔틴-페체네그 전쟁; Total War (1)

  통상 비잔틴-로마 제국에 있어서 11세기 중반은 대체로 평온한 시기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는 번영과 평화의 와중에서도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들은 한 번에 한 개만 발발한 것이 아니라 몇 차례의 대규모 반란과 더불어 때에 따라서는 동시에 3개 전선에서 발생할 정도로 예측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만 단위 이상 병력이 동원된 전투만 수십여 차례에 달한다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전쟁이 빈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이며 격렬한 전투가 연속되었고 가히 총력전(Total War) 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양쪽의 투쟁 세력 모두에게 부담을 안겨 준 전쟁이 제 1차 페체네그 전쟁(1046.12 또는 1047.1~1053)이었습니다.[1] 우선은 1차 페체네그 전쟁이 벌어지기까지의 간략한 상황을 개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066년 무렵의 대략적 정세(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진은 Paradox사의 Crusader Kings Ⅱ


 페체네그 족과 로마인들이 처음 접촉한 것은 상당히 이른 시기였습니다. 10세기의 47년간을 재위한 콘스탄디노스 7세(912-959)는 후계자인 로마노스 2세(959-962)에게 정치를 교육시키기 위해 저술한 『제국 행정에 관하여De adminstrado imperio』 중에서 페체네그의 각 부족들의 분류를 설명하면서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은 지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공물을 주어 혹시나 있을지 모를 충돌을 가급적 피하라는 것이었지요.[2]

 하지만 콘스탄디노스 7세가 살던 10세기 초중반의 시대와 달리 10세기 중후반에는 전반적인 국제질서가 다시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평화로운 국가로 탈바꿈했으며 로마 제국의 북방 완충지대로 존재했던 1차 불가리아 제국이 루스의 지도자 스뱌토슬라프에 의해 일단 붕괴되었으며 요안니스 1세 황제가 이에 반격하는 와중에 완전히 로마 제국에 합병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로마 제국이 스스로 북방 경계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물론 974년과 1018년의 불가리아 합병 이후에도 한동안은 대체로 평화를 유지하였지만 그것은 위태로운 균형이었습니다.



 페체네그 인들이 11세기에 처음으로 약탈 행위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1027년이었습니다. 일부 페체네그 군이 도나우 강을 넘어 쳐들어온 것이었는데 로마노스 4세(1068-1071)의 아버지이자 시르미온의 행정관이었던 콘스탄디노스 디오기네스가 즉각 이를 물리치고 조용히 도나우 강을 넘어 돌아가도록 한, 그 공로로 불가리아의 공작에 임명된 것이 첫 번째 기록입니다.[2] 이 때 잡혀간 포로들은 1년 후인 1028년 사채 빚 혹은 공적인 의무 불이행 때문에 수감된 이들을 방면하는 와중에 정부에서 몸값을 지불하고 송환되었습니다. 페체네그 인들은 4년 후인 1032년에 다시 도나우 강을 넘어 쳐들어왔으나 기록을 남길 정도로 특기할 만한 영향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1034년에 도나우 강을 넘은 페체네그 인들은 방위선의 틈을 따라 불가리아를 지나 테살로니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약탈을 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035년에도 특기 사항은 없으나 일련의 페체네그 인이 도나우 강이 결빙된 틈을 노려 광범위한 지역에서 약탈을 하였다고 합니다. 매우 심각한 충돌이 일어난 것은 1036년이었습니다. 이 한 해에 페체네그 인들은 세 차례나 로마의 영토로 밀고 들어왔으며 많은 포로뿐만 아니라 5명의 장군까지 사로잡아 돌아갔습니다. 로마 측에서는 다행히도 페체네그 인들은 이후 10년간 추가 행동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다만 1043년경 도나우 강 유역에서 어려운 전투 끝에 케겐(kegen)이라고 하는 지도자가 오구즈 족을 격퇴시켰다는 기록으로 보건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던 상황인 까닭인 듯합니다.[3]


 로마 제국은 그 동안 미하일 4세(1034-1041) 시기에 걸쳐서 여러 차례의 격렬한 반란과 재해로 혼란스러웠으며 미하일 5세 정부가 끝내 시민들의 대대적인 봉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물러나자 최소한 그 전 정부들보다는 안정을 가져왔고 균형을 잡은 콘스탄디노스 9세(1043-1055) 정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046년 페체네그 족은 격렬한 내분을 거쳐 새로운 전쟁으로 끌려들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오구즈 족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한 지도자 케겐은 그 전쟁 동안 은신하고 있었던 최고 지도자 티라크가 자신을 질시하여 살해하려는 음모를 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장군이 너무 뛰어나다보면 유목민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갈등관계가 여기서도 발생한 것이죠. 케겐은 벨레마르니스와 파구마니스 두 부족의 지지를 얻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티라크와 나머지 11개 부족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한동안 주변을 배회하던 케겐은 로마 황제에게 귀의할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1045년 2만 명의 지지자를 거느린 케겐은 드리스트라에 도착했으며 근처의 섬으로 물러간 다음 지역 행정관인 미하일에게 서신을 보내어 귀의하여 활약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미하일은 케겐에게 생필품을 전량 지급해주었으며 케겐은 안전하게 콘스탄디누폴리로 이동했습니다. 황제는 페체네그 지도자를 친절하게 맞아주었으며 케겐은 스스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함과 동시에 자신의 지지자들 또한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이제 케겐은 로마식 귀족인 파트리키오스이자 도나우 강에 위치한 항구 3개와 많은 배후지를 획득하고 로마인들의 동맹이 되었습니다.

포에데라티의 오랜 전통이 다시 발휘되었습니다.

 그러나 케겐과 그 백성들을 받아들인 순간 페체네그 족과 로마인들은 이미 전쟁에 바짝 다가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로마 정부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티라크의 군대가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나우 강에 함대를 파견해 두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046년 페체네그 군 1,000명, 그리고 이후에는 2,000명이 도나우 강을 수차례 건너며 약탈 행각을 벌이자 케겐의 군대가 즉각 이에 맞서 격퇴시켰으며 티라크의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보복전의 성격이었던 탓에 남자들은 살해되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고 아이들은 로마인들에게 팔리는 처지가 되었지요.

 마침내 티라크의 인내심도 바닥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티라크가 보낸 대사는 페체네그와 로마의 오랜 동맹을 상기시키며 만약 황제가 반역자를 추방하지 않을시 전면전도 불사하겠음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케겐을 ‘부당한 취급을 받은 망명자’로 인식한 황제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온 사람에게 배신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그에게 대해 음모를 꾸민 이들에 대한 저항을 멈추게 하지도 않을 것이오.”

콘스탄디노스 황제가 페체네그 대사에게 한 말[4]


 그리고 아무리 동맹의 탈을 썼다 하더라도 페체네그 인들이 근년에 벌인 약탈 행각은 상당히 심각했기 때문에 진지한 논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습니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은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케겐에게 연락을 취하여 도나우 강변의 제방을 부지런히 방비하도록 지시했으며 어떤 적이든지 나타나면 즉각 자신에게 알려주어 서부 중앙군이 행정관 미하일과 연계하여 페체네그의 도강 시도를 저지할 수 있도록 하라고 언질을 주었습니다. 또한 제국 함대 소속 1백 척(10,000-12,000명)의 함대가 도나우 강에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5] 그러한 상황이니 이 도나우 강이 마르거나 얼지 않는 한 적이 도나우 강을 넘는 일은 요원해보였습니다. 그런데 도나우 강처럼 큰 강이 쉽게 얼겠어요? 기껏해야 조금 얼거나 말겠지요.


 한편 부정적인 결과를 받아든 티라크는 당연히 격노하였으며 당장 총력전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페체네그 군 수만 명(8만 정도로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이 앞장서고 전 페체네그 민족 80만 명[6]이 도나우 강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1046년 12월과 1047년 1월의 겨울은 매우 혹독하여 도나우 강이 꽁꽁 얼어버렸던 차였습니다. 결국 이렇게 도나우 강 방어선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티라크의 ‘국가’ 전체는 도나우 강 남쪽의 로마 영토에 정착하였으며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영토에 있던 로마 장군들은 페체네그 인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통합할 것을 요청해왔으며 긴급 지원 요청을 받은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즉각 아드리아누폴리 공작인 아리아니티스와 불가리아 행정관인 바실리오스에게 휘하의 군대를 소집하여 케겐과 디라키온 공작 미하일의 군대와 합류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들은 다가오는 침략에 대비해 자신들의 군세를 합쳐야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해 보였으므로 동부군에도 소환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로마 장군들이 이 대응 불가능해 보이는 대군을 상대로 협동을 서두르고 있을 때 티라크의 군에서 탈주한 탈영병이 엄청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수많은 페체네그 인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음식과 물로 인한 풍토병으로 추정되는 이 병으로 수십만의 페체네그 ‘국가’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으며 케겐은 곧바로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용맹함에 용기를 얻은 로마군도 공세로 전환했습니다. 수천 명의 페체네그 군이 순식간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케겐은 ‘독사는 아직 그 꼬리를 움직일 수 없는 겨울에 죽여야 한다’는 이민족 속담까지 인용하면서 성인 페체네그 포로들을 모두 학살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야만인스럽고 불경건스러우며 로마인들의 관대함이 없는 주장으로 간주되어 거절되었습니다. 황제와 불가리아 행정관 바실리오스는 이 포로들이 무장을 해제한 후 오랜 전쟁 때문에 인구가 적은 불가리아에 정착한다면 제국에 큰 유익이 될 것이라며 포로들을 무장해제 시킨 후 작은 단위의 수로 나누어 세르디카 평야와 나이수스, 에우차폴리 등에 정착시켰습니다. 이미 페체네그 국가 자체가 전투 직후 붕괴된 후였으므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외에 귀족 등의 지배층 150명과 티라크도 각자 귀족 작위를 받고 로마 귀족 사회에 통합되었습니다.

1047년경 페체네그 족의 정착 추정(클릭하면 커집니다)
에우차폴리가 어딘지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료가 없으므로 후대의 기록을 참고해 임의로 수정했습니다.

 

 약 2년이 지난 1049년, 이 무렵의 제국은 동방의 셀축 튀르크와 전쟁을 벌이느라 분주했습니다. 1048년 9월 18일, 카페트론 전투에서 셀축의 대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1049년에는 셀축의 토그룰 벡이 직접 군세를 거느리고 쳐들어온 상황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정착한 페체네그 인 중 15,000명을 선별하여 페체네그 귀족인 4명의 장군에게 지휘를 맡긴 다음 콘스탄디노스 하드로발노스란 이가 이베리아[7]까지 페체네그 군을 안내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15,000명과 4명의 장군은 황제가 선물로 제공한 말을 타고 토그룰 벡의 군세를 향해 진군하다가 겨우 다마트리스 궁전[8]에 이르렀을 때 회의를 열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주인인 로마 황제를 위해 동료 튀르크 인들과 싸우러 먼 곳에 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카탈림 장군의 찬동을 얻은 페체네그 군은 불가리아의 본거지로 돌아가기 위해 우선 길잡이인 콘스탄디노스부터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다마트리스 황궁 건물 3층에 숨어 참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감시자를 따돌린 후 페체네그 군은 서둘러 성 타라시오스 수도원이 위치한 해안으로 움직였습니다. 이들이 수도를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해 나가는 것뿐이었는데 당연히 당장 1만 5천이나 되는 병사들이 탈 배를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카탈림과 그의 병사들은 말에 박차를 가하여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넜습니다(?)[9] 해협을 건넌 페체네그 군은 곧장 세르디카로 향했습니다. 아드리아누폴리 공작인 콘스탄디노스 아리아니티스는 자신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모아, 이들을 추격하였으며 야 이 반란군 노무 XX들아! 로비초까지 추격해 셀티라는 페체네그 지휘관의 숙영지를 유린하였습니다. 셀티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여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페체네그 인들의 국가가 빠르게 재건될 것임은 분명해졌습니다.


[1] 페체네그 전쟁은 통상 세 차례의 대규모 전쟁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차전은 1046 - 1053년 사이에 치러진 전쟁이고 그 후 30년 평화조약이 준수된 이후에 1086년 12월에 다시 양자 사이에 발발한 것이 2차 페체네그 전쟁 그리고 1121년에 마지막으로 벌어졌던 것이 3차 페체네그 전쟁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2] 실제로 이런 정책이 지켜졌는지에 대해선 자세한 기록을 본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10세기 중후반까지는 불가리아 제국이 완충지대 역할을 했기 때문에 큰 의의가 있는 정책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3] 페체네그 인들은 차후에 쿠만 인들에 의해 크게 밀리게 됩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아니었고요.

[4] 조나라스 연대기 17권 26장 11절.

[5]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실들과 이후의 사실들은 조나라스 연대기와 스킬리체스 연대기에서 거의 전부 참고한 것입니다.

[6] 80만이란 수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과장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사실이라 하더라도 페체네그 족 단일의 수치가 아니라 주변 여러 민족들이 같이 섞여 들어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7] 이 이베리아는 히스파니아가 있는 이베리아 반도가 아니라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 사카르토벨로 세력이 접하는 지역입니다. 대략 아니(Ani) 시를 포함하는 오늘날 터키 동북부 지역에 해당합니다.

[8] 어딘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만 콘스탄디누폴리에 가까운 소아시아 해안 근교에 있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9] 이 사건은 스킬리체스 연대기에 언급되고 있는데 보스포로스 해협이 그 정도로 얕을 순 없다보니 다만 잘못 와전된 소문인 듯합니다. 분명한 것은 페체네그 군 1만 5천이 어떤 방법으로든 보스포로스(오늘날 아나돌루 히사르가 위치한, 옛 성 타라시오스 수도원 지점)에서 유럽으로 넘어왔다는 점입니다.


12세기 세율 추정

Angeliki 선생의 논문인 The Byzantine Economy: An Overview에서 나오는 것을 보니 Oikonomides 선생이 쓴 Role of the Byzantine State와 Lefort 선생의 Rural Economy에서 인용해서 표현하길 농업세는 23%, 비농업세는 20%로 나오는군요 그럼 국내총생산의 21.25%를 세금으로 걷는다는것 같더군요. 자세한 글은 차후 정리해서 쓰도록 해야겠네요.

이걸 지금껏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니...ㄷㄷ

근대형 중세 병원과 사회 구조(2)

  지난번에 올라온 글을 통해서 우리는 원래 호텔 내지 여관의 의미를 가졌던 Xenodocheion 혹은 Xenon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자선 기관과 병원이 혼재된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여기서 다시 자선 기관의 의미가 퇴색하고 순수한 병원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예고했던 대로 오늘 다루어볼 내용은 실무적인 측면에서 각 병원은 어떤 재정 기반에서 활동하였기에 전면 무상으로 운영될 수 있었는가, - 이 부분이 차후 핵심적인 내용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측면이 있습니다 - 그리고 몇 종류의 의사와 의료 보조, 의학교수와 의학도, 약학의, 간호원과 일반 노무 직원 등의 임금과 근무 등의 편린입니다. 원래 여기서 다루려했던 진료법과 치료법, 진료 기록 데이터베이스화 등의 주제는 세번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1편이 더 늘어나겠군요ㅠㅠ) 먼저 병원의 전반에 관한 것부터 다루어 볼까요?

  지금까지 이 시대의 병원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세세한 자료는 1136년에 판토크라토르 수도원 공동체에 세워진 '판토크라토르 병원'의 규율 내지 준수 사항을 기록한 Typikon(티피콘)입니다. 이 자료를 참고해보면 판토크라토르 병원은 총 세 군데의 벽난로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병원도 대개의 경우 마찬가지여서 9세기 초의 한 기록에서도 노변(hearth)을 배치하였다고 하며 12세기, 트라키아 지방에 위치한 아이노스 시의 한 병원에서도 환자들의 난방을 위해 연료를 평소 확보하도록 하는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판토크라토르 병원의 경우 총 3개의 벽난로가 있었는데 이 중 1개는 대형 벽난로로 대부분의 병실이 위치한 건물에 있었으며 각 1개씩의 난로는 외과 그리고 별도의 동으로 구분시켜놓은 부인과에 마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판토크라토르 병원이 총 5 군데의 장소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 각각은 수술실, 수술대기실 겸 회복실, 부인과, 일반 병실, 응급실, 안과 질환 전용 병실 등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총 50석의 자리를 항시 마련해두고 있었구요. 이 장소들은 순전히 입원 환자를 위해서만 제공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래 진료를 위해서도 따로 장소를 마련해야하는 것은 필수였습니다. 대체로 10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일단의 의사들이 거리를 활보하면서 환자들을 만나 진찰해주는 방식이 주류를 점했다면 이후부터는 외래 진료소를 마련하여 환자들을 진찰하는 방식이 주류를 점하게 됩니다. 여기에 시약소까지 결합되면서 일반 시민들은 간단한 병인 경우 나름 편하게 진찰 받고 약을 받아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판토크라토르 병원은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의 수도사를 동원해서 목욕 시설을 관리하면서 환자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끔 관리하게 했습니다. 이외에도 의학도들을 위해 고대의 갈레노스, 히포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해서 트랄레스의 알렉산드로스(이 사람은 의학 교과서 70권을 정리, 작성한 것으로 유명한 의사죠) 등의 유명 의학 전문가들의 저서를 구비한 자체 도서관과 의학 교수가 의학도들을 가르칠 강의실, 진료/처방 기록 및 약재/수술 도구를 보관하는 창고, 빨래방 등을 갖추고 있어 상당히 큰 규모였습니다. 동시에 병원에서는 예배당 또한 갖추고 있어 환자들에게 심신의 안정을 제공하는 역할도 수행하였죠. 대체로 다른 병원들 또한 기본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병원을 이용하는 주민들의 분포도 사뭇 흥미롭습니다. 본래 병원이 출발했던, 자선기관의 개념 즉 극빈층을 구제하기 위한 장소로서의 개념은 이제 다소 무색해졌으며 병원은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의 제공과 풍부한 식단의 제공 친절한 직원들의 접대 때문에 빈민이나 일반 서민 뿐 아니라 중산층의 시민들도 상당수 이용한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1860년대 병원. 시설 측면에서 판토크라토르보다 나은 게 그다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수도원 단일 공동체와 일반 다중(多衆)은 어떻게 왕래하였을까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왕래 내지 순환 체계가 동로마식 복지 시스템 대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즉 '경건한 공동체(pious house)'에 속한 복지기관인 병원, 호스피스(말기 환자용 병원), 양로원, 고아원은 모두 외부 일반 시민들로부터 각각 이 시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맞아들였고 이 중에서 양로원, 고아원의 경우 환자가 발생했을 때 바로 병원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더 이상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 특히 12세기 한 병원의 사례로는 - 7일간의 판단 보류 기간을 두어 마지막까지 지켜본 이후 최종 판정을 내려 병원에서 퇴거시키되 호스피스로 옮겨 마지막까지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돌봄을 제공하였습니다. 그 외 공동체에 속한 수도사들이 관리하는 목욕 시설은 공동체 수용인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사용하였습니다. 병원의 경우 환자들은 스스로 일주일에 2일, 의사의 처방이 있으면 언제든지 의사의 호송을 받으며 목욕할 수 있도록 배려받았습니다. 대표적으로 '경건한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병원 등의 조직을 간단하게 도식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으로 다루어볼 부분은 이 병원을 운영하는 실무자들, 곧 병원 근무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병원 조직의 복잡화, 전문화는 4세기 이래로 꾸준히 계속되었으며 12세기에 사실상 완성되었습니다. 이 체제는 오늘날로 말하면 여러 의사를 여러 조수들과 간호조무원들이 보조하며 환자의 수발을 들어주는 하인들과 환자의 위생을 책임져 줄 세탁인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136년에 세워진 판토크라토르 병원보다 거의 600년 더 일찍이 세워졌던 삼손 병원에서는 전문적인 외과의를 고용하기 시작했으며 안과 질환이 있는 환자를 위한 격리 병동을 마련하면서 안과 전문의 또한 고용해 배치하였습니다. 이외에 흐리스토도티스라는 병원에서는 의학을 공부한 보조들을 고용했는데 이러한 양상은 600년 후에 세워진 판토크라토르 병원과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흐리스토도티스 병원에서는 야간 업무를 감독할 의료 보조를 꼭 1명씩 요구하였는데 이것마저 후대에 그대로 유지되어 판토크라토르 병원에서 고용한 5명의 보조 중 1명이 야간 전용이었습니다. 이렇듯 후대에 복잡하게 유지된 체제는 사실상 유스티니아누스의 의료 개혁으로 병원이 의료 서비스의 중심으로 등극한 이래 그 본질을 유지해온 것이었습니다.

  병원 근무진들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단연 의사라 할 수 있는데 이 의사직 또한 다양하게 분류되어 그 직급과 임금이 사뭇 달랐습니다. 의사직급의 변천 또한 그 명칭의 다양함이 두드러지지만 여기서는 매우 정제되어 있는 형태인 판토크라토르 병원의 것만을 단독 소개하도록 합니다. 병원의 5구역 각각을 책임지는, 의사가 일단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 명의 의료 보조(hypourgoi embathmoi)들의 도움을 받아 업무를 집행했고 총원은 2명으로 한 달을 번차(주기)로 교대 근무했습니다. 또한 두 명의 추가 보조(hypourgoi perissoi) 그리고 두명의 하인이 남성 전용인 4개 구역 각각에 배치되었습니다. 또한 부인과에는 의사-한 달 주기로 교체하는 두 명-와 한 명의 여성의사, 두 명의 여성 하인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진행했습니다. 이외에도 병원은 네 명의 의사를 더 고용했는데 두 명은 외과 전문의였고 나머지 두 명은 내복약에 관련된 이들로 구성하여 외래 진료를 맡게 했습니다. 외래 진료에 투입된 의사들은 다소 직급이 낮은 의사들로 주로 추가 의사 정도로 표현되곤 했습니다. 여기에는 네 명의 의료 보조와 네 명의 추가 보조가 활동을 보조했습니다.이들 의사들의 서열을 표시하면 이하와 같습니다.


1. 프로토메니테스, 2 교대제, 안과 질환, 장 질환 등의 심각한 질병

2. 외과전문의, 2 교대제, 골절, 부상 전문

3. 남성 전문의(2개 구역), 2 교대제, 일반의

4. 여성 전문의, 2 교대제, 일반의

5. 수도원 의사, 2 교대제, 병원 조직과는 별도로 관리

6. 외래 진료의(외과 전문의 2명, 내복약 전문의 2명), 2교대제, '추가 의사'

  이외에도 여러 명의 추가 의사를 두고 있다고 기록되었지만 구체적인 지위나 직급, 역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아 생략합니다. 이렇듯 최소한 10명 정도의 의사가 총 50명의 환자를 관리하는 체계가 판토크라토르 병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외에도 프로토메니테스를 초월하는 의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프리미키리오스'로 불렸습니다. 이들은 병원의 치료 기능 전반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도 2명씩 뽑아 한 달씩 교대 근무를 했는데, 해당 차례가 되는 달에는 매일 각 구역을 회진하면서 환자를 다시 살펴보고 각 환자의 치료법을 감독하며 환자들의 불평이나 불만사항을 접수하였습니다. 또한 심각한 환자의 경우에는 직접 외래 진료의의 처방도 살펴보곤 했습니다.

  의사들은 자신들이 근무하는 달에는 매일 진료에 대한 보고를 해야 했고 수술을 집도하고 새로운 환자를 맞아들였습니다. 이들은 밤이 긴 겨울에는 하루에 한 번만 출근하면 되었으나 5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는 매 하루당 두 번씩 출근, 즉 저녁을 먹고 다시 출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당시 정부 공무원들의 근무 시간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의 고용은 대체로 이러하였고 이외에도 약학의 6명-長 1명, 일반의 3명, 보조의 2명), 안내인 1명, 세탁부 5명, 주전자 관리인 1명, 요리사 2명, 말구종 1명, 잡역부 1명, 회계관 1명, 사제 2명, 낭독자 2명, 제빵사 2명, 운구인 4명, 장례 전문 사제 1명, 변소 청소부 1명, 제분업자 1명을 두었습니다. 말 그대로 환자를 최대한 최선의 방법으로 돌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고용이었습니다.

  이렇듯 환자는 50명 남짓한 중형 병원이었지만 판토크라토르 병원은 만만치 않은 고용인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막대한 고용 비용은 어디서 나왔으며 누가 이 병원을 재정적으로 관리했을까요? 병원 재정의 최종적인 권한은 판토크라토르 공동체의 長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공동체 관리자'(오이코노모스)직을 가진 네 명의 수도사의 조언을 들으면서 운영했습니다. 이들은 구세주 교회와 수도원 등을 운영했는데 그들에게는 재산 판매권, 토지 임대권, 자산 관리인 임명권, 회계사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요양원과 병원의 자금과 물자가 부족하지 않게 확충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병원 운영에 있어서는 어떤 권한도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병원 운영의 권한은 노소코모스라는 '병원장'에게 있어 그들이 병원의 실제 운영을 감독했습니다. 그는 미조테로스라는 직책의 도움을 받으며 병원의 식량, 연료, 약재가 언제나 충분하게끔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직책의 중요성 때문에 병원 규율에서는 이들에게 업무 관장에 있어 수도원에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는 의무를 면제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 운영 측면에서 병원은 매우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황립 병원이 이러할진대 다른 병원의 운영도 유사하게 운영되었습니다.

"돈은 받지만 운영은 저희가 알아서 할테니 관심 끄시죠?"

"......!"


  병원의 운영은 대략 이러하고, 다음으로 다루어야 할 부분은 진료와 치료 부분입니다.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큰 영향을 받은 비잔틴 의사들이었지만 그들은 5-6세기를 거치면서 의학 이론에만 경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중시하게 되었고 이는 의학도들의 교육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진료, 내복약 제조, 수술 방법의 개선, 병리학적인 측면에서의 해부학 접근 등의 새로운 변혁이 일어남에 따라 비잔틴의 의학은 상당 부분 자생적인 노력에 의해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결과물로서 나왔던 것이 '뇨분석 진료'(Uroscopy)와 '맥박 진료'의 발전 그리고 다양한 수술 기법, 예를 들어 '무혈 신장 결석 제거 수술' - 이 수술법은 아무리 늦어도 10세기에 나타났던 것인데 서구 의학에서 다시 개발된 것은 1824년 1월 13일, Jean Civiale에 의해서였습니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천천히 다루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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