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형 중세 병원과 사회 구조(2)

  지난번에 올라온 글을 통해서 우리는 원래 호텔 내지 여관의 의미를 가졌던 Xenodocheion 혹은 Xenon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자선 기관과 병원이 혼재된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여기서 다시 자선 기관의 의미가 퇴색하고 순수한 병원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예고했던 대로 오늘 다루어볼 내용은 실무적인 측면에서 각 병원은 어떤 재정 기반에서 활동하였기에 전면 무상으로 운영될 수 있었는가, - 이 부분이 차후 핵심적인 내용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측면이 있습니다 - 그리고 몇 종류의 의사와 의료 보조, 의학교수와 의학도, 약학의, 간호원과 일반 노무 직원 등의 임금과 근무 등의 편린입니다. 원래 여기서 다루려했던 진료법과 치료법, 진료 기록 데이터베이스화 등의 주제는 세번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1편이 더 늘어나겠군요ㅠㅠ) 먼저 병원의 전반에 관한 것부터 다루어 볼까요?

  지금까지 이 시대의 병원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세세한 자료는 1136년에 판토크라토르 수도원 공동체에 세워진 '판토크라토르 병원'의 규율 내지 준수 사항을 기록한 Typikon(티피콘)입니다. 이 자료를 참고해보면 판토크라토르 병원은 총 세 군데의 벽난로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병원도 대개의 경우 마찬가지여서 9세기 초의 한 기록에서도 노변(hearth)을 배치하였다고 하며 12세기, 트라키아 지방에 위치한 아이노스 시의 한 병원에서도 환자들의 난방을 위해 연료를 평소 확보하도록 하는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판토크라토르 병원의 경우 총 3개의 벽난로가 있었는데 이 중 1개는 대형 벽난로로 대부분의 병실이 위치한 건물에 있었으며 각 1개씩의 난로는 외과 그리고 별도의 동으로 구분시켜놓은 부인과에 마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판토크라토르 병원이 총 5 군데의 장소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 각각은 수술실, 수술대기실 겸 회복실, 부인과, 일반 병실, 응급실, 안과 질환 전용 병실 등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총 50석의 자리를 항시 마련해두고 있었구요. 이 장소들은 순전히 입원 환자를 위해서만 제공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래 진료를 위해서도 따로 장소를 마련해야하는 것은 필수였습니다. 대체로 10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일단의 의사들이 거리를 활보하면서 환자들을 만나 진찰해주는 방식이 주류를 점했다면 이후부터는 외래 진료소를 마련하여 환자들을 진찰하는 방식이 주류를 점하게 됩니다. 여기에 시약소까지 결합되면서 일반 시민들은 간단한 병인 경우 나름 편하게 진찰 받고 약을 받아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판토크라토르 병원은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의 수도사를 동원해서 목욕 시설을 관리하면서 환자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끔 관리하게 했습니다. 이외에도 의학도들을 위해 고대의 갈레노스, 히포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해서 트랄레스의 알렉산드로스(이 사람은 의학 교과서 70권을 정리, 작성한 것으로 유명한 의사죠) 등의 유명 의학 전문가들의 저서를 구비한 자체 도서관과 의학 교수가 의학도들을 가르칠 강의실, 진료/처방 기록 및 약재/수술 도구를 보관하는 창고, 빨래방 등을 갖추고 있어 상당히 큰 규모였습니다. 동시에 병원에서는 예배당 또한 갖추고 있어 환자들에게 심신의 안정을 제공하는 역할도 수행하였죠. 대체로 다른 병원들 또한 기본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병원을 이용하는 주민들의 분포도 사뭇 흥미롭습니다. 본래 병원이 출발했던, 자선기관의 개념 즉 극빈층을 구제하기 위한 장소로서의 개념은 이제 다소 무색해졌으며 병원은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의 제공과 풍부한 식단의 제공 친절한 직원들의 접대 때문에 빈민이나 일반 서민 뿐 아니라 중산층의 시민들도 상당수 이용한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1860년대 병원. 시설 측면에서 판토크라토르보다 나은 게 그다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수도원 단일 공동체와 일반 다중(多衆)은 어떻게 왕래하였을까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왕래 내지 순환 체계가 동로마식 복지 시스템 대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즉 '경건한 공동체(pious house)'에 속한 복지기관인 병원, 호스피스(말기 환자용 병원), 양로원, 고아원은 모두 외부 일반 시민들로부터 각각 이 시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맞아들였고 이 중에서 양로원, 고아원의 경우 환자가 발생했을 때 바로 병원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더 이상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 특히 12세기 한 병원의 사례로는 - 7일간의 판단 보류 기간을 두어 마지막까지 지켜본 이후 최종 판정을 내려 병원에서 퇴거시키되 호스피스로 옮겨 마지막까지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돌봄을 제공하였습니다. 그 외 공동체에 속한 수도사들이 관리하는 목욕 시설은 공동체 수용인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사용하였습니다. 병원의 경우 환자들은 스스로 일주일에 2일, 의사의 처방이 있으면 언제든지 의사의 호송을 받으며 목욕할 수 있도록 배려받았습니다. 대표적으로 '경건한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병원 등의 조직을 간단하게 도식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으로 다루어볼 부분은 이 병원을 운영하는 실무자들, 곧 병원 근무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병원 조직의 복잡화, 전문화는 4세기 이래로 꾸준히 계속되었으며 12세기에 사실상 완성되었습니다. 이 체제는 오늘날로 말하면 여러 의사를 여러 조수들과 간호조무원들이 보조하며 환자의 수발을 들어주는 하인들과 환자의 위생을 책임져 줄 세탁인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136년에 세워진 판토크라토르 병원보다 거의 600년 더 일찍이 세워졌던 삼손 병원에서는 전문적인 외과의를 고용하기 시작했으며 안과 질환이 있는 환자를 위한 격리 병동을 마련하면서 안과 전문의 또한 고용해 배치하였습니다. 이외에 흐리스토도티스라는 병원에서는 의학을 공부한 보조들을 고용했는데 이러한 양상은 600년 후에 세워진 판토크라토르 병원과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흐리스토도티스 병원에서는 야간 업무를 감독할 의료 보조를 꼭 1명씩 요구하였는데 이것마저 후대에 그대로 유지되어 판토크라토르 병원에서 고용한 5명의 보조 중 1명이 야간 전용이었습니다. 이렇듯 후대에 복잡하게 유지된 체제는 사실상 유스티니아누스의 의료 개혁으로 병원이 의료 서비스의 중심으로 등극한 이래 그 본질을 유지해온 것이었습니다.

  병원 근무진들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단연 의사라 할 수 있는데 이 의사직 또한 다양하게 분류되어 그 직급과 임금이 사뭇 달랐습니다. 의사직급의 변천 또한 그 명칭의 다양함이 두드러지지만 여기서는 매우 정제되어 있는 형태인 판토크라토르 병원의 것만을 단독 소개하도록 합니다. 병원의 5구역 각각을 책임지는, 의사가 일단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 명의 의료 보조(hypourgoi embathmoi)들의 도움을 받아 업무를 집행했고 총원은 2명으로 한 달을 번차(주기)로 교대 근무했습니다. 또한 두 명의 추가 보조(hypourgoi perissoi) 그리고 두명의 하인이 남성 전용인 4개 구역 각각에 배치되었습니다. 또한 부인과에는 의사-한 달 주기로 교체하는 두 명-와 한 명의 여성의사, 두 명의 여성 하인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진행했습니다. 이외에도 병원은 네 명의 의사를 더 고용했는데 두 명은 외과 전문의였고 나머지 두 명은 내복약에 관련된 이들로 구성하여 외래 진료를 맡게 했습니다. 외래 진료에 투입된 의사들은 다소 직급이 낮은 의사들로 주로 추가 의사 정도로 표현되곤 했습니다. 여기에는 네 명의 의료 보조와 네 명의 추가 보조가 활동을 보조했습니다.이들 의사들의 서열을 표시하면 이하와 같습니다.


1. 프로토메니테스, 2 교대제, 안과 질환, 장 질환 등의 심각한 질병

2. 외과전문의, 2 교대제, 골절, 부상 전문

3. 남성 전문의(2개 구역), 2 교대제, 일반의

4. 여성 전문의, 2 교대제, 일반의

5. 수도원 의사, 2 교대제, 병원 조직과는 별도로 관리

6. 외래 진료의(외과 전문의 2명, 내복약 전문의 2명), 2교대제, '추가 의사'

  이외에도 여러 명의 추가 의사를 두고 있다고 기록되었지만 구체적인 지위나 직급, 역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아 생략합니다. 이렇듯 최소한 10명 정도의 의사가 총 50명의 환자를 관리하는 체계가 판토크라토르 병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외에도 프로토메니테스를 초월하는 의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프리미키리오스'로 불렸습니다. 이들은 병원의 치료 기능 전반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도 2명씩 뽑아 한 달씩 교대 근무를 했는데, 해당 차례가 되는 달에는 매일 각 구역을 회진하면서 환자를 다시 살펴보고 각 환자의 치료법을 감독하며 환자들의 불평이나 불만사항을 접수하였습니다. 또한 심각한 환자의 경우에는 직접 외래 진료의의 처방도 살펴보곤 했습니다.

  의사들은 자신들이 근무하는 달에는 매일 진료에 대한 보고를 해야 했고 수술을 집도하고 새로운 환자를 맞아들였습니다. 이들은 밤이 긴 겨울에는 하루에 한 번만 출근하면 되었으나 5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는 매 하루당 두 번씩 출근, 즉 저녁을 먹고 다시 출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당시 정부 공무원들의 근무 시간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의 고용은 대체로 이러하였고 이외에도 약학의 6명-長 1명, 일반의 3명, 보조의 2명), 안내인 1명, 세탁부 5명, 주전자 관리인 1명, 요리사 2명, 말구종 1명, 잡역부 1명, 회계관 1명, 사제 2명, 낭독자 2명, 제빵사 2명, 운구인 4명, 장례 전문 사제 1명, 변소 청소부 1명, 제분업자 1명을 두었습니다. 말 그대로 환자를 최대한 최선의 방법으로 돌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고용이었습니다.

  이렇듯 환자는 50명 남짓한 중형 병원이었지만 판토크라토르 병원은 만만치 않은 고용인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막대한 고용 비용은 어디서 나왔으며 누가 이 병원을 재정적으로 관리했을까요? 병원 재정의 최종적인 권한은 판토크라토르 공동체의 長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공동체 관리자'(오이코노모스)직을 가진 네 명의 수도사의 조언을 들으면서 운영했습니다. 이들은 구세주 교회와 수도원 등을 운영했는데 그들에게는 재산 판매권, 토지 임대권, 자산 관리인 임명권, 회계사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요양원과 병원의 자금과 물자가 부족하지 않게 확충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병원 운영에 있어서는 어떤 권한도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병원 운영의 권한은 노소코모스라는 '병원장'에게 있어 그들이 병원의 실제 운영을 감독했습니다. 그는 미조테로스라는 직책의 도움을 받으며 병원의 식량, 연료, 약재가 언제나 충분하게끔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직책의 중요성 때문에 병원 규율에서는 이들에게 업무 관장에 있어 수도원에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는 의무를 면제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 운영 측면에서 병원은 매우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황립 병원이 이러할진대 다른 병원의 운영도 유사하게 운영되었습니다.

"돈은 받지만 운영은 저희가 알아서 할테니 관심 끄시죠?"

"......!"


  병원의 운영은 대략 이러하고, 다음으로 다루어야 할 부분은 진료와 치료 부분입니다.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큰 영향을 받은 비잔틴 의사들이었지만 그들은 5-6세기를 거치면서 의학 이론에만 경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중시하게 되었고 이는 의학도들의 교육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진료, 내복약 제조, 수술 방법의 개선, 병리학적인 측면에서의 해부학 접근 등의 새로운 변혁이 일어남에 따라 비잔틴의 의학은 상당 부분 자생적인 노력에 의해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결과물로서 나왔던 것이 '뇨분석 진료'(Uroscopy)와 '맥박 진료'의 발전 그리고 다양한 수술 기법, 예를 들어 '무혈 신장 결석 제거 수술' - 이 수술법은 아무리 늦어도 10세기에 나타났던 것인데 서구 의학에서 다시 개발된 것은 1824년 1월 13일, Jean Civiale에 의해서였습니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천천히 다루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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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아이지스 2012/02/22 23:06 # 답글

    이런 거 보면 제국은 이래서 제국이구나 싶습니다.
  • Panhypersebastos 2012/02/22 23:36 #

    확실히 오랫동안 유지되는 체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듯 하지요. 이 점에서만큼은 본받을 점도 보이긴 합니다.
  • 대공 2012/02/23 00:04 # 답글

    중간에 전승이 끊겼다는거군요
  • Panhypersebastos 2012/02/23 00:09 #

    외과 기술이 14세기에 급속도로 쇠퇴하고 의료 체계가 거의 후계자를 찾지 못한 채 멸망해버리다보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살레르노 의대나 산타 마리아 노바 병원도 몇가지 연관성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지요. 대체로 살균법과 현대적 방역이 없는 조건 하에서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19세기 의학과 그 수준이나 성취의 측면에서 상당히 유사하다고 전하더군요.
  • 행인1 2012/02/23 22:44 # 답글

    '호스피스'의 개념이 중세부터 있었다니 놀랍군요.(비록 서유럽이 아니라 비잔틴이지만)
  • Panhypersebastos 2012/02/23 23:46 #

    병원 자체가 종교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기관이라 종교적 색채가 많이 옅어졌다고 해도 치료법이 없는, 사실상 사망 상태의 환자들을 그냥 쫓아내는 일은 당시에 '윤리' 문제를 심각하게 낳았다고 하는군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치료할 수 있는 환자만 받아야 하는 병원에 방치해둘 수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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